及影

[오이카게] 우리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느매느매 2017. 12. 22. 00:44


- 카게른 합작 '우리 토비오' 참여 했습니다! :)

- 카게야마 생일 축하해! (2017. 12. 22)

- 배우 오이카와 X 작가 카게야마



오이카게, 우리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Q. 최근 읽어본 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면?

. 제가 워낙 독서랑은 거리가 멀어서요. (웃음) 그나마 기억에 남는 책은 우리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예요. 요즘 엄청 뜨고 있는 베스트셀러라고 하길래 저도 읽어봤죠. 이 책 내용은 주인공인 초코민트의 이야긴데요. 뜨겁게 사랑을 하던 두 사람의 나날 중 민트가 쪽지 한 통만 남겨둔 채 갑자기 훌쩍 떠나버려요. 민트가 떠난 후 초코는 그를 정말 많이 그리워 하다가 민트를 찾으러 긴 여정을 떠나는데 그 이야기들을 담은 내용이에요. 베스트셀러답게 내용 구성도 탄탄하고, 작가님의 문장력이 정말 대단하셔서 순식간에 빠져들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 팬 분들을 비롯한 더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Q. 만약 우리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의 작가님을 만나게 된다면?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소문을 들어보니 문학상 같은 큰 행사를 제외하곤 모습을 많이 안 보인다고 들었거든요. 만약 작가님을 만나게 된다면 제 책에다가 꼭 싸인 받고 싶네요! 그리고 얼른 두 번째 이야기가 나오면 좋겠…….]

 

카게야마는 잡지를 읽다말고 덮어버렸다. 잡지 표지엔 배우 오이카와 토오루 특집이라는 문구와 함께 이번엔 가을 남자가 컨셉인 듯 하얀색 터틀넥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 있는 오이카와의 사진이 보였다. 읽기는 무슨, 거짓말인 거 다 티나. 손에 들린 머그컵을 탁자 위로 소리 나게 내려놓은 카게야마는 방 안 구석 책들이 쌓여 있는 곳에 잡지를 던져 버렸다.

어제 저녁 출판사에 일이 생겨 잠시 들렀을 때 출판사 전면에 붙은 오이카와 사진에 카게야마는 발걸음을 돌릴 뻔 했다. 잡지사 ‘YOU&I’에서 새로 출간된 11월 잡지였다. 티비에서 안 보려고 일부러 통신사도 끊었건만 여기에 떡하니 붙어있네. 카게야마는 오이카와의 사진에서 시선을 피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 순식간에 편집실 앞에 도착했다.

, 작가님 오셨어요?’

. 표지 디자인이

어 토비 작가님!’

, 안녕하세요. 편집장님. 카게야마는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편집장을 바라보며 인사했다. 표지 디자인이 바뀌었다고. 맞다 작가님, 이번에 새로 나온 잡지 볼래요? 아니, 표지 디자인 보여 달라고요. 카게야마는 짜증남이 얼굴에 드러나려는 것을 꾹 참곤 편집장이 건네는 잡지를 받았다. 출판사 전면에 붙어 있던 ‘YOU&I’의 가을 잡지, 배우 오이카와 토오루 특집이었다. 카게야마는 순간 얼굴을 구겼다. 웃고 있는 오이카와의 얼굴, 그의 모습을 보자니 언뜻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옛 기억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저었다.

전 잡지 필요 없어서요.’

그래요? 그럼 인터뷰 부분에 작가님 책 언급된 부분만 한 번 봐요.’

내 책이 언급 됐다고? 편집장님의 말에 카게야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오이카와 씨가 나를?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에 그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다시금 잡지를 받았다.

그러면서 잡지까지 빌려왔건만, 나를 기억하기는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다. 분명 매니저가 주는 예상 질문을 받고 대충 베스트셀러 한 권 골라서 요약된 줄거리만 외웠겠지. 푹 한숨을 내쉰 카게야마는 뻐근하게 저려오는 가슴 속을 애써 모르는 척 했다. 이래서 큰 기대는 하면 안 되는 거다. 카게야마는 글을 쓰다 말고 펜을 내려놓고선 침대에 누웠다. 잠이라도 자면 조금이라도 잊혀 지겠지. 그러길 바라며 그는 눈을 감았다.

일렁이는 기억 속, 강당 전체가 창을 통해 내려온 노을빛으로 온통 따스했다. 공을 튕기는 소리, 공의 표면과 단단한 바닥이 서로 마찰되는 순간 그 떨림이 가슴 속을 흔들었다. 허억, 허억. 소년의 거친 숨소리가 고요한 허공을 맴돌다 이내 희미해진다. 그 소년을 남몰래 구경하던 오이카와는 노을에 비친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다 그에게 다가갔다.

토비오쨩, 늦었어. 체육관 문 닫아야 하거든?”

, 오이카와 씨. 안 가셨습니까?”

카게야마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다가도 익숙한 얼굴에 경계하던 표정을 풀었다. 벌써 여섯 시 반이야, 이러다 학교에 갇혀버린다. 겁 아닌 겁을 주는 오이카와에 카게야마는 둥그런 눈을 깜박거리다 이내 대답했다. , 금방 정리하겠습니다. 웬일로 순순히 말을 듣지? 오이카와는 미간 사이를 찡긋거리다가도 여러 곳에 떨어진 배구공들을 주워 정리하기 시작하는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봤다. 공을 줍는 손이 공의 크기와 대조 돼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저런 건지. 유독 손이 작아보였다. 오이카와는 어느 순간 제 코 앞으로 도르륵 굴러온 배구공을 내려다 보다 그 공을 주우러 온 카게야마를 마주했다.

오이카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키에 얇은 목과 가녀린 팔, 마른 다리, 아무것도 모를 미숙한 신체. 그는 일순간 가슴 속을 일렁이는 알 수 없는 욕망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오이카와 씨?”

?”

괜찮으십니까. 때 묻지 않은 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느리게 들린다. 오이카와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내면의 목소리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배구공이 자그마한 손에서 떨어져 바닥에 두어 번 부딪치다 천천히 굴러갔다. 카게야마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갠 오이카와는 놀란 듯한 그의 푸른 눈동자를 흘겨보다 그의 얇은 손목을 잡고 살며시 손을 마주 잡았다. 어느새 뒷목에 닿은 커다란 손바닥에 온기를 느끼며 카게야마는 눈을 감았다. 뜨겁게 마찰되는 혀끝이 닿을 때마다 불에 데인 듯 아렸다. 서툰 움직임 사이로 물기 어린 소리가 새어나와 귓속을 울리며 자극했다. , . 작게 앓는 사이로 길게 늘어지는 타액이 투명하게 빛나며 하얀 피부를 타고 길게 떨어진다. 입 안을 훑으며 쓸어내리는 축축한 살덩이가 깊숙이 파고들 때마다 오이카와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숨이 차오름에도 아랑곳 않고 움직이는 통에 카게야마는 점점 긴박해져 왔다. 오이카와 씨, 오이카와 씨. 속으로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어깻죽지를 꽉 붙잡던 카게야마는 뒤로 넘어가려던 순간 오이카와의 혀끝을 깨물었다.

! 급히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오이카와는 찌르르 아려오는 혀끝에 혓바닥을 내밀었다. 그의 맞은편에 있던 카게야마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막고 얼굴이 빨개진 채 멀뚱히 서 있었다. 뒤늦게 고개를 숙이며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던 카게야마는 쿵쿵거리며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에 눈을 꾹 감았다.

체육관 벽면에 기대 스르륵 주저앉으며 입술을 다물고 있던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는 그를 바라보다 그의 얇은 손목을 붙잡았다. 카게야마는 손목에 닿아오는 온기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진정이 되던 심장이 다시금 빠르게 뛰어댔다. 토비오,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가 작게 내뱉었다. ,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오이카와에게 붙잡힌 손목을 살며시 빼낸 카게야마는 벽면에 기대두었던 자신의 가방을 들곤 급히 강당에서 빠져나갔다.

체육관에서 나오자 바깥은 이미 땅거미가 져 어두워지고 있었다. 빠르게 발걸음을 움직이다가도 잠시 자리에서 멈칫한 카게야마는 고개를 돌려 강당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이카와는 뒤따라오지 않았다. 몇 분을 그 자리에 서 있던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걷다, 얼마 안 가 뜀박질 했다. 카게야마는 여전히 빠르게 뛰는 심장이 뜀박질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카게야마는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파고드는 강렬한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다 몸을 일으켰다. 협탁 위에 올려 진 시계는 어느새 오후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보다 오랜 시간 잠을 잤건만 이상한 꿈을 꿔 적게 잔 것보다 못 했다. 하아. 카게야마는 마른세수를 하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꿈속에까지 찾아와 괴롭히는 그 사람이 미친 듯이 싫었다. 그리고 몇 년을 그 사람을 잊지 못 하는 자기 자신은 더 싫었다. 이게 다 어제 받아 온 잡지 때문이다. 태워버리든가 해야지. 구석에 책 더미 위로 던져버린 잡지를 노려보던 카게야마는 그의 과거 모습을 떠올렸다.

오이카와는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이 멋있고, 짜증날 만큼 잘생겼다. 이왕이면 못 살길 바랐는데 유명한 배우로 자리매김해 누구보다도 잘 살고 있었다. 생각하니까 좀 재수 없네. 괜히 차오르는 짜증에 표정을 구기던 카게야마는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여전히 그를 잊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소설에다 쓸 만큼 그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꿈에서 나온 그와 마주하고, 현재 그의 모습을 바라보니 새삼스럽게 가슴이 아팠다. 오이카와 토오루를 잊어버리자고 결심한 지도 벌써 10, 10년이 넘는 동안 그를 잊으려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사랑을 해 보고 위험한 잠자리까지 몇 번이고 겪어 봤다. 하지만 오이카와 토오루는 잊혀 지지 않았다. 그의 잘 정돈된 갈색 머리칼과 예쁜 미소, 그와 뜨겁게 맞닿았던 입술까지도.

착각일 뿐이야.’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그의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냉정하기 그지없었던 그의 눈동자, 그 속에 담긴 어리기만한 자신의 모습. 봄바람에 스치는 몰골이 초라했다. 조금 더 생각을 하다간 금방이라도 울컥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아 카게야마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이미 때를 놓쳤다는 듯 하얀 이불은 그의 눈물로 젖어들고 있었다. 날카로운 바늘이 가슴에 몇 번이고 박혀왔다. 카게야마는 저려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조용히 흐느꼈다. 정말 몇 년 째 바보 같다.

 

* * *

 

유리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니까 앞으로 그녀를 잘 부탁해요. 하야토 씨! 자신의 맞은편에 있는 남자와 마주하며 입 꼬리를 올려 웃던 오이카와는 멀리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에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다 남자의 어깨를 툭툭 치곤 이내 캐리어를 끌고 사라졌다. ! 감독의 목소리와 함께 오이카와는 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오이카와 씨! 특별출연 정말 고마워요.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오이카와는 악수를 건네는 감독의 손을 맞잡으며 생글생글 웃었다. 뭘요! 이즈루 감독님 부탁인데 제가 거절할 수 있나요. 능청스러운 그의 말에 감독은 허허 웃어 보였다. 그러다가도 감독 너머로 보이는 매니저의 손짓을 발견한 오이카와는 다음 스케줄 때문에 먼저 가보겠다며 꾸벅 고개를 숙이곤 자리를 벗어났다. 세트장을 벗어나는 내내 주변에서 고생하셨다며 인사를 건네는 스태프들 때문에 연신 고개를 숙이며 세트장에서 벗어난 오이카와는 차에 타자마자 허리를 쭉 폈다. 아이고, 허리야. 매니저가 건네는 물병을 받으며 푹신한 차 시트에 기댄 오이카와는 우드득, 뼈가 맞춰지는 듯한 소리에 인상을 찡그리다 기운 없이 축 늘어졌다. 다음 토크쇼가 마지막이지? 고개를 끄덕이는 매니저를 바라보다 이동하는 동안 조금이라도 잠을 자려 목 베개를 찾던 오이카와는 빈 옆자리에 어제 막 출간 된 자신이 메인인 잡지를 발견했다.

우리들의 마음을 홀린 배우 오이카와 토오루’, ‘가을 남자 오이카와 토오루의 모든 것

문구가 참. 오글거리는 타이틀에 어깨를 으쓱이다가도 잡지를 들어 보인 오이카와는 하얀색 터틀넥에 얼굴을 파묻고 카메라 정면으로 시선을 향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봐도 참 잘생겼다.

그 왕자병 좀 어떻게 할 수 없냐?”

? 나 또 입 밖으로 말했어?”

오이카와는 어느 순간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자신을 뒤돌아 본 매니저를 마주하며 눈을 찡긋거렸다. 진짜 심각하다 심각해. 매니저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운전에 집중하고 다시금 잡지로 시선을 둔 오이카와는 장수를 몇 번 넘기다 그만 잡지를 덮었다. , 잡지야 항상 사진만 다르고 내용은 똑같지. 잡지를 원래 자리로 내려놓던 그는 잡지에 가려져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처음 보는 소설책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책 표지는 아이보리색 바탕으로 민트 색으로 칠해진 인물과 초코 색으로 칠해진 인물이 서로를 마주하며 서 있었다. 그들 사이로 거리를 잴 때 쓰는 줄자처럼 생긴 것이 두 인물 사이를 닿을 듯 말 듯 연결하고 있었다. 이 책 뭐야? 책을 들어 매니저에게 들이대자 매니저는 책을 잠시 흘기듯 바라봤다. 네가 인터뷰에서 읽었다고 했던 책이잖아. 그의 말에 인터뷰를 했던 때를 떠올리던 오이카와는 인터뷰를 하기 며칠 전 매니저가 건네주던 흰색에 검은 글씨가 박혀 있던 어떤 책을 떠올렸다. , 그 책이구나. 대본을 제외한 다른 글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대충 제목만 보고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줄거리만 찾아 외웠더니 생각나는 게 고작 흰 바탕에 검은 글씨다. 표지가 이렇게 생겼었구나. 이게 요즘 엄청 인기 있는 책이랬지 아마…….

토비?”

작가 이름이 특이하네, 필명인가? 제목 밑에 작게 쓰여 있는 작가 이름을 보다 책 사이에 끼인 책날개를 펼친 오이카와는 보통 있을 법한 작가의 사진은 없고 이름과 매우 간략히 써져 있는 이력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진은 없을 수 있는데 보통 이력 같은 건 이것보다 더 길지 않나.

이 시대 가장 애타고, 감동적인 연인의 이야기왜인지 보통의 책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으며 책 표지를 다시 한 번 둘러보다가도 책 커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구에 그냥 내용 뻔한 사랑 이야기겠네, 싶었다. 오이카와는 책을 펼쳐 순식간에 장수를 넘기더니 중간 부분에서 멈췄다.

 

민트를 찾으러 다닌 지 벌써 30일 째, 오늘 아침 일어났을 땐 초코는 배가 고파 어쩔 줄 몰랐다. 어젯밤 깡패 녀석들만 만나지 않았다면 작은 가게에서 주먹밥 하나라도 사 먹을 돈이 있었을 텐데.

 

뭐야, 이거 사랑 이야기 맞아? 오이카와는 중간 부분에 첫 번째 줄을 읽다 다시 한 번 표지를 살폈다. ‘이렇게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또 본 적이 없다. 감동적이다.’ 하지만 표지엔 사랑 이야기라는 리뷰가 떡하니 쓰여 있다. 여기만 봐선 아닌 거 같은데.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고요한 상가들 사이를 지나다 향긋한 카레 냄새의 이끌려 카레집 앞에 멈춰선 초코는 유일하게 불이 켜진 창문을 바라보다 용기를 내 문을 두드리려 손을 뻗었다. 손님, 아직 가게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때 초코의 뒤에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

 

오이카와는 자신이 펼친 페이지가 좀 독특한 부분인가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머릿속에 물음표를 가득히 채웠다. 그러면서도 책을 놓지 않던 그는 다음 페이지로 시선을 옮긴 순간 흠칫하며 책을 잡고 있던 손을 살짝 떨었다.

 

혹시 주인장은 민트를 본 적이 있을까? 초코는 설거지를 하다가도 주인장을 흘깃 바라보았다.

저 주인장님 혹시

카게야마, 불편하게 그리 부르지 말고 카게야마라고 불러.”

 

카게야마? 지금 카게야마라고. 오이카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이고 다시 쳐다봤지만 주인장의 이름은 카게야마가 분명했다.

익숙한 이름 하나로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물음표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오이카와의 기억은 복잡하게 어질러졌다. 우연의 일치인지 뭔지 하필 공간도 카레 집이다. 그 아이가 가장 좋아한다 말했던 카레, 더욱 그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토비오쨩 작가가 됐다고 했던가. 오이카와는 글씨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동창들 사이에서 이따금 들었던 카게야마의 소식을 떠올렸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보이는 동그랗고 새까만 뒤통수에 오이카와는 눈을 연신 깜박였다. , 눈 아파. 오랜 시간 끼고 있던 렌즈가 눈을 자극해 아릿했다.

웬일로 조용한가 싶었더니 책 읽고 있었냐.”

? , . 저기 나 렌즈 빼야할 거 같아. 눈이 아프네.”

많이 아파? 안약 줘?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렌즈통과 안경을 건네는 매니저를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괜찮다며 손사래 쳤다. 렌즈만 빼면 될 거 같아. 오이카와는 책을 뒤집어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렌즈를 빼는 순간 시야는 순식간에 흐릿하게 변했다. 새삼 자신의 시력이 이렇게 안 좋았구나, 라는 걸 느끼며 안경을 쓴 그는 다시금 눈을 깜박였다. 눈앞엔 더 이상 그 뒤통수가 보이지 않았다. 가자, 30분 뒤에 녹화야. 매니저의 재촉에도 오이카와는 뒤집어 놓은 책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똑같은 이름이 책에서 나올 수도 있지. 괜히 떠올라선 나도 참. 그래, 신경쓰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고 해 놓고선 오이카와는 토크쇼 녹화를 하는 내내 시도 때도 없이 그 이름이 떠올라 평소와 달리 녹화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 했다. 오늘따라 많이 힘들어 보여. 가서 빨리 쉬자. 고개를 끄덕인 오이카와는 목 베개를 베며 시트에 편하게 기댔다. 창문을 통해 바라본 하늘은 온통 새까맸다. 태양을 대신해 불을 밝힌 여러 상가들은 누구에게 질 세라 서로 불을 밝히며 반짝였다. 창문 밖으로 빠르게 바뀌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이카와 씨?’

오이카와는 그때의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 순진하기 짝이 없던 어린 아이의 입술을 처음 뺏어갔던 그 날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잊으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냥 자연스레 잊어가겠지 싶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의외로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작았던 그 아이, 동그란 얼굴 속에 담긴 순진한 표정, 근육이 붙지 않아 아직 마르고 얇았던 팔과 다리. 머릿속은 하면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었다. 자신의 입술은 순식간에 아이의 입술을 덮쳤다.

오이카와는 떠오른 과거에 감고 있던 눈을 번뜩 떴다. 잠깐, 생각해 보니 나 되게…… 쓰레기잖아. 뒤늦게 몰려오는 죄책감에 낯빛을 어둡게 드리운 그는 과거의 자신을 욕했다. 나 같으면 신고 했을 텐데, 토비오는 착한 건지 바보인 건지.

좋아합니다.’

아니면, 정말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건가. 아직까진 찬 기운이 맴돌던 봄날, 졸업장을 들고 있는 자신의 앞에 나타나선 무작정 고백을 하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깊게 한숨을 내쉰 오이카와는 덜컹거리는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만약 그 날 고백을 받았다면, 그 날 키스를 하지 않았더라면.

 

오이카와 선배. 좋아합니다. 아직은 차기만 한 봄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쳤다. 오이카와는 그 바람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수줍은 고백에 잠깐 동안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 했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좋아했던 거지. 몇 분이 흐르고 나서야 머릿속엔 딱 하나의 물음표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작년 겨울, 체육관의 단 둘이 남았었던 그 날. 그래, 그 날부터구나. 오이카와는 너무나도 투명해서 뻔히 속이 다 보이는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 속에 담긴 자신과 마주했다.

그 날 카게야마가 떠난 후 혼자 남은 체육관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저 그 아이와 맞닿았던 입술의 느낌, 서툰 몸짓에 깨물린 혀끝이 아프기만 하고 일렁이는 이 마음이 도대체 무슨 느낌인가 했다. 호기심? 욕망? 아니면…… 아니, 그건 아니야.

오이카와 토오루는 고작 중학생 삼학년 밖에 안 된 사람이었다. 곧 고등학생이 된다 하여도 아직 뭘 모르는 어린 학생, 사랑이란 것에 다가가기엔 많이 미숙했다. 그래서 부정했다. 이건 사랑일 리가 없다고. 오이카와는 카게야마의 발자국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단 걸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체육관을 밝게 비추던 주홍빛에 노을도 조금씩 어둡게 지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바닥에 떨어진 배구공을 주웠다. 그리고 마치 서브를 하기 전 행동하는 것과 같이 빙그르르, 배구공을 돌렸다. 그래, 내가 토비오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토비오, 그거 농담이지?”

그런 장난은 오이카와 씨한테 하면 재미없어.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오이카와는 그 모습을 눈치 챘지만 모른 척 했다. 혹시 작년 겨울 일 때문이라면 잊어 줘. 그건 단지. 착각이겠지,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아직까지도 자신을 올곧이 바라보는 말간 얼굴을 마주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른 표정, 그 표정엔 오이카와는 알 수 없는 슬픔이 가득했다.

그건 단지

……

착각일 뿐이야.”

오이카와 빨리 와!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이와이즈미의 목소리에 그는 그대로 뒤돌아섰다. 뒤돌아선 발걸음이 잠시 주춤하다가도 이내 움직였다. 이와쨩 같이 가! 약하게 부는 봄바람이 허전한 뒷목을 차갑게 맴돌았다. 어쩐지 서늘한 기분에 뒤를 돌아봤을 땐 그 자리에 카게야마는 없었다. 뭐 해? 안 가고,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부름에도 우뚝 멈춰서 그 아이를 대신해 자리 잡은 벚꽃 잎을 바라봤다.

 

일어나 오이카와, 오이카와! 눈을 뜬 오이카와의 앞엔 바람에 휘날리는 벚꽃은 무슨 매니저의 얼굴만이 덩그러니 보였다. 그새 잠들었던 건가. 도착했다며 얼른 들어가 쉬라는 매니저의 말에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 한 채 주섬주섬 자신의 물건을 챙기던 오이카와는 뒤집어 놓았던 책을 바로 잡아 가방에 넣었다. 동시에 핸드폰을 집어든 그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며 빌라 입구로 들어섰다.

여보세요? 이와쨩? 늦게 전화해서 미안해. 혹시 말이야.”

토비오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

 

* * *

 

평소와 다르게 아침 일찍 외출 준비를 한 카게야마는 핸드폰 화면에 뜬 시간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1222, 약속 시간까진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지만 준비를 다 끝낸 카게야마는 마지막으로 코트까지 걸치고 평소에 매고 다니던 백팩이 아닌 가죽으로 된 크로스백을 어깨에 멨다. 현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전신 거울 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그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마저 정리하곤 집 밖으로 나섰다.

어느새 많이 추워진 날씨는 지금이 겨울이란 것을 분명히 보여줬다. 숨을 내뱉으면 하얗게 입김이 나와 공기 중에 흩날리다 금방 사라졌다. 그것을 바라보다 눈앞에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의 창문을 통해 스며든 햇빛이 카게야마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창밖을 바라본 그는 때마침 지나치던 근처 중학교에 시선을 멈췄다. 운동장에선 학생들이 옹기종기 체조를 하고 있었다. 맨 앞에 서 있는 키가 작은 남학생이 일순간 중학생 시절 자신의 모습으로 바뀌었다가 사라졌다. 아마 그 일이 딱 이맘 때 쯤이었나. 카게야마는 잊고 싶지만 잊지 못하는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다 지이잉, 하고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화면을 바라봤다.

[갑자기 촬영 시간이 늦춰져서 30분 정도 늦을 거 같아. 정말 미안해. - 오이카와 씨]

카게야마는 문자 내용을 읽다가 새삼스레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된 그 사람의 이름이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오이카와 씨, 그렇게 익숙한 이름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리도 멀게만 느껴지는 건지. 카게야마는 천천히 답장을 입력했다.

나 오이카와야. 카게야마는 일주일 전 자신에게 걸려온 그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한다. 자신을 오이카와라고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처음엔 장난 전화를 한 것이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토비오, 라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억양과 예전보다는 무게가 더해졌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그 음색은 오이카와 토오루가 맞았다. 어떻게 내 번호를 안 거지? 카게야마는 머릿속으로 자신의 연락처를 알고 있을만한 사람들을 떠올리다 다시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온 몸이 굳어졌다. 토비오? 10년 만에 다시 들어보는 목소리, 짜증나게 목소리도 여전히 멋졌다.

카게야마는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 오이카와 씨. 오랜만이네요. 혹시 자신의 목소리에 담긴 떨림이 전해지진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에 주먹을 꽉 움켜쥔 카게야마는 그의 입에서 나온 뜻 밖에 제안에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혹시 다음 주에 만날 수 있어? 처음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 홀리듯 빨려 들어간 카게야마는 거절할 생각도 없이 덜컥 약속을 잡아버렸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카게야마는 더 이상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코트 주머니 속에 넣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 한 일이었기에 온 정신이 불안정 했다. 그 사람, 만나도 되는 걸까. 지금이라도 약속을 취소한다면, 하지만 그는 도착하는 곳까지 버스에서 내리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다시금 창밖을 바라봤다. 햇살은 여전히 따갑게 그를 비추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 카게야마 토비오]

헉헉, 자신을 알아본 팬들을 피해 멀리 돌아서 와 이제야 약속 장소에 도착한 오이카와는 괜히 매니저를 돌려보냈나 싶었다. 간만에 생긴 사적인 약속인 터라 혼자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 바보였다. 가쁘게 심호흡을 하면서도 카페에 들어가기 직전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것을 잊지 않은 오이카와는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적은 오래된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구석진 창가 자리, 카게야마 토비오가 앉아 있었다.

카게야마 그 책 작가라더라. 베스트셀러우리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였나?’

작가 토비(TOBI)’가 카게야마였다니,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정말 뒤로 넘어갈 뻔 했다. 그걸 알고 나니 필명인 토비가 토비오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비오쨩이라면 그럴 만도. 여전히 단순하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와이즈미에게서 받은 그의 번호를 가만히 바라봤다. 연락 해 볼까, 하지만 차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책에서 카게야마의 이름을 본 이후 오이카와는 마치 대본을 외울 때처럼 순식간에 책을 다 읽어버렸다. 처음 읽었던 것과 달리 사람들의 리뷰 그대로 연인을 향한 애타는 사랑, 절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니 이상하게도 카게야마를 만나고 싶었다.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만나고 싶었기에 며칠을 고민하다 그에게 연락을 한 오이카와는 현재 눈앞에서 카게야마를 마주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이렇게 어색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침묵이 맴돌았다. 하트 모양이 그려진 카페라떼를 홀짝이던 오이카와는 살며시 잔을 내려놓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하지만 곧바로 후회하며 속으로 자책했다. 무슨 전 여자친구냐.

, 잘 지냈습니다.”

그래.”

간결한 답변에 다시금 침묵이 맴돌았다. 이번엔 옆에 있던 물을 마신 오이카와는 메마른 입술을 축이곤 어떻게든 이 어색함을 풀려 머릿속을 굴렸다. 맞다. 토비오 책 읽었어, 재밌더라. 미동 없이 가만히 앉아 있던 카게야마의 몸이 움찔했다. 진짜 읽으셨구나. 카게야마는 눈앞에 있던 뜨거운 코코아를 마신 후 잔을 내려놓았다. 코코아는 아주 잠깐 파문이 일었다.

처음엔 흔한 사랑 이야긴 줄 알았는데 읽어보니까 아니더라. 애절하고다른 소설들 보다 새로웠어.”

보통 그런 건 경험에서 나오던데, 설마 이거 실화라거나 그런 거 아니지? 오이카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카게야마는 그런 그를 멍하니 마주하다 무언가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어요. 카페라떼를 마시던 오이카와는 갑작스런 카게야마의 말에 마시던 것을 도로 내뱉을 뻔 했다. 정확히는 제 마음을, 심정을 담은 이야기예요.

선배의 인터뷰를 실은 잡지에서 제 책이 언급 됐을 때, 그리고 선배한테서 연락이 왔을 때. 저 솔직히 기대 많이 했어요. 선배가 저를 잊지 않았구나 하고요.”

하지만 역시 기대 같은 거 다 부질없는 짓이었어요. 정작 상대는 저를 생각하지도 않는데. 오이카와는 일렁이는 카게야마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 모습이 꼭 중학생 때에 그와 똑같았다.

저 선배가 중학교 졸업을 하고서부터 몇 년을, 선배를 잊지 못 해서 죽을 것만 같았어요.”

나를 잊지 못 했다니? 그게 무슨. 오이카와는 순식간에 머릿속을 치고 들어 온 카게야마의 말에 온 정신이 복잡했다. 카게야마는 그런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도 내려놓은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메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근데 선배 덕분에 그런 것도 오늘부로 끝내려고요.”

앞으로 연락 안 하면 좋겠습니다. 카게야마는 곧바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오이카와는 어질러진 머릿속에 떠나는 그를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 하고 망부석 마냥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카페에서 벗어난 카게야마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던 것도 잠시 카페에서 멀어졌다는 걸 깨닫곤 자리에서 멈춰 섰다. 허리를 약간 숙이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카게야마는 옷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았다. 분명 잘한 일임에도 마음 속 깊은 곳을 누군가 찌르는 듯 아파왔다. 이렇게 끝냈으면 된 거지 뭐. 그래 잘 된 거야. 카게야마는 허리를 쭉 펴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빨개진 코끝이 시큰했다.

 

* * *

 

카게야마를 만난 후로 벌써 일주일이 지나고, 그 일주일 동안 오이카와는 복잡한 생각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 했다. 나를 잊지 못 했다니어떻게 그럴 수가. 라는 생각을 수십 번, 수백 번은 했다. 오이카와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고백을 했던 카게야마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도 가슴께가 저릿하게 아파왔다.

오이카와, 오이카와! 온통 구름에 가려져 오늘따라 어두운 밖을 창을 통해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자신을 부르는 매니저의 목소리에 그를 바라봤다. 그거 봤어? 너 요즘 읽는 그 책 작가님 말이야. 카게야마? 매니저의 말에 바로 머릿속에 카게야마의 이름이 떠오른 오이카와는 뒤로 숙이고 있던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왜 무슨 일이야. 혹시 회사로 연락 왔어?”

무슨 소리야? 아니 오늘 아침에 기사가 떴더라고.”

기사? 무슨 기사?”

원래 예정 됐던 두 번째 시리즈 연재를 그만둔다더라.”

그리고 건강 악화로 다른 나라가서 치료 받고 온댔나. 매니저의 말에 오이카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너 잘 읽던데 아쉬워서 어떡하냐. 매니저는 룸미러로 오이카와를 살피며 아쉽다는 듯 웃어보였다. 그 사이 기사를 확인하고 있던 오이카와는 카게야마가 관련된 수많은 기사들 중 가장 최근에 올라온 딱 하나의 기사를 발견했다.

베스트셀러 우리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의 소설가 토비(TOBI)’가 건강상 문제로 …… 오는 20일 다른 나라로 떠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잠깐, 오늘이 며칠이었지?

.”

?”

당장 차 돌려.”

 

시끌벅적한 사람들 사이에서 간단히 챙긴 캐리어를 이끌고 천천히 걸어가던 카게야마는 출국대를 찾으려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항상 한 자리에만 머무는 그에겐 공항이란 너무나도 정신없는 곳이었다. 이러다 길을 잃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핸드폰 속 시간을 보곤 조금의 여유를 찾은 카게야마는 몇 개 없는 연락처를 쭉 내리다 오이카와의 이름을 발견했다.

오이카와를 만나고 난 후 벌써 일주일, 그 동안 오이카와에게선 정말로 문자 한 통도 없었다. 물론 올 거라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고작 네 번 밖에 주고받지 않은 문자 내용을 보니 이상하게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오이카와의 이름을 꾹 누른 카게야마는 화면에 뜬 삭제하시겠습니까?’ 라는 문구를 보며 이번엔 진짜로, 정말 잊어버리자는 다짐을 했다.

토비오!”

를 누르려는 순간, 멀리서 카게야마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시선이 집중된 카게야마는 눈앞에 보이는 사람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오이카와 씨?”

숨을 거칠게 내쉬며 헉헉거리던 오이카와는 멀뚱히 서 있는 카게야마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이카와 씨가 어떻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던 카게야마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오이카와를 올려다봤다.

토비오, 급하니까 앞, 뒤 다 자르고 먼저 미안하다는 말부터 할게.”

……

정말 미안해. 전부 어리석었던 내 잘못이야.”

그러니 이런 나 때문에 너의 글을 놓지 마. 카게야마는 자신이 여기 있는 줄 어찌 알고 찾아 온 오이카와가 내뱉어버린 말들에 덜덜 떨리는 손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캐리어의 손잡이를 더 세게 붙잡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이렇게 붙잡는 거 정말 염치없고 어이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괜찮다면……

우리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 있게 허락해 줘.

오이카와의 마지막 말의 귓가가 먹먹해지며 카게야마의 눈시울이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흐릿해지는 시야에 카게야마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곤 눈물을 참으려 애썼다. 하지만 참지 못 하고 흘러내리는 눈물에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감싼 그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어찌할 줄 모르고 흐느꼈다. 젠장, 오이카와 토오루 이…… XX. 그런 카게야마를 바라보며 주춤거리던 오이카와는 이내 그를 껴안았다. 너무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토비오.

근데 오이카와 씨……

? , 맞다 너 비행기 표 당장 취소

사람들이 다 쳐다봐요.”

뒤늦게 주위를 둘러 본 오이카와는 어느새 자신과 카게야마를 보고 있는 사람들과 몇몇은 핸드폰을 들어 자신을 찍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 배우였지…….

 

* * *

 

우여곡절 끝에 재회한 오이카와와 카게야마는 선, 후배 이상이지만 연인 이하인 관계로 아주 평탄하게 지내는 중이었다.

카게야마는 무작정 혼자 정한 일을 일방적으로 통보해서 죄송하다며 출판사 측에 사과를 했고, 인터넷에 올라갔던 기사는 오보였다며 정정 기사를 다시 올렸다. 오이카와는 오로지 카게야마를 만나러 가야한다는 생각 하나로 마음대로 녹화를 펑크 낸 바람에 대표에게 대차게 혼나고 말았다. 하지만 새로 주연으로 캐스팅 된 드라마에서 높은 시청률을 뽑아내며 아주 잘 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 카게야마 책의 두 번째 이야기가 출간 됐다.

다들 천천히 줄 서서 들어가 주세요! 도쿄의 대형 서점 앞엔 사람들이 길게 줄 지어 서 있었다. 서점 입구 앞에 세워진 입간판엔 우리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두 번째 이야기소설가 토비(TOBI)’ 사인회라는 문구가 책의 표지와 함께 크게 적혀 있었다. 긴 줄을 따라 들어가면 여러 책들이 전시된 사이로 테이블 위에서 사인을 하며 독자들을 맞이하고 있는 카게야마가 있었다.

작가님 꼭 뵙고 싶었어요! 저 하나만 질문해도 될까요?”

네 괜찮습니다.”

혹시 민트와 초코의 이야기가 작가님의 이야긴가요?”

, 또 이 질문인가. 앞서 수차례 들어온 질문이었던 지라 어떤 것을 물어볼 지 대충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다들 같은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도 실화 같은가? 물론 실화라고 말한다면 내 딴에선 맞긴 하지만. 카게야마는 머리를 예쁘게 양갈래로 묶은,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독자와 시선을 마주하다가도 사인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 이야기 아니에요. 학생은 어쩐지 아쉬운 낯빛을 비추며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직접 만든 쿠키를 건네곤 넘어갔다. 곰돌이가 민트색의 하트를 안고 있는 초코 쿠키였다. 센스 있네.

다음 분 오세요. 옆에 있던 스태프가 다음 사람을 부르자 코앞으로 다가온 독자는 카게야마의 앞에 서자마자 불쑥 질문을 던졌다. 작가님,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쿠키를 매만지던 카게야마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앞엔 마스크를 쓰고 있는 오이카와가 우뚝 서 있었다. 동그래진 카게야마의 눈을 바라보며 예쁘게 눈웃음을 지은 오이카와는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핸드폰을 보라는 듯 톡톡 가리켰다. 곧바로 옆에 두었던 핸드폰을 바라본 카게야마는 화면에 뜬 문자의 미리보기를 보고선 웃음을 터트렸다.

[매니저 눈 피해서 몰래 빠져 나왔어. - 오이카와 씨]

그 문구에 카게야마는 어떻게 빠져 나왔을 지 안 봐도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작게 웃었다. 질문이 뭔데요? 그러다가도 이내 그에게 되묻자 오이카와는 마스크를 살짝 내리곤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작가님의 민트는 어딨나요?”

여태 들어본 것 중에 가장 새로운 질문, 카게야마는 그 질문에 손에 들고 있던 두꺼운 매직을 손가락 사이에 넣고 고민을 하는 척 표정을 구겼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이미 눈앞에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매직의 뚜껑을 닫고선 그것으로 눈앞에 있던 오이카와를 가리킨 카게야마는 다시금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아직 마음은 멀리 있어요. 조금 더 가까워지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하지만……

……

더 멀어지진 않을 거 같아요.”

카게야마와 오이카와의 시선이 부드럽게 얽혔다.

가까이 있었지만, 가까이 있기를 부정했던 두 사람이 한 발자국 더 다가가는 순간이었다.